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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헤르만 헤세




그는 증오로 가득 차서 집시들이 몰고 온 초록색 마차 아랫부분의 주름을 파리 블루로 할퀴듯 그려 넣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크롬 옐로를 방충석防衝石 모서리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칠하지 않고 비워 둔 곳에다 치노버를 찍어서 튀어나온 하양을 죽여 버렸으며, 영속을 얻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잔인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노랑과 나폴리 옐로로 고함을 쳤다. 그는 신음을 내면서 더 많은 파랑을 무미건조한 먼지투성이의 초록에 내동댕이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속의 불을 저녁 하늘에 붙였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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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보고 느낀 점은 한마디로 '(색채에 관해)작정하고 썼구나'였다. 


화가 클링조어가 마지막으로 보낸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여름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 그대로 그의 마지막 계절이었던 여름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는 계속되는 작업으로 눈이 아프고, 술과 여자로 점철되는 생활에서 오는 신체적, 정신적인 피폐까지 감내하면서도 예술혼을 불사르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한다는 내용이다.


헤세는 클링조어의 뜨거운 여름을 표현하는 장치로 곳곳에 붉은 색상을 심어두었다. 예컨데 붉은 시집, 붉은 두건의 소녀, 붉은 계열의 파레트, 산악여왕의 붉은 옷, 붉은 포도주, 마리아의 피 등에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된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붉은 색은 상기하였듯 그의 삶의 마지막 모습인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의 불꽃이 상징하는 자기파괴적인 모습과도 연결된다. 결국 그것은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클링조어와 글을 쓸 당시의 헤세의 나이가 마흔 두 살로 동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헤세는 아들 마르틴의 병환과 1차대전 당시에 전쟁의 광기에 대한 글을 투고하면서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배신자, 도피자. '둥지를 더럽히는 녀석' 등으로 매도되면서을 겪으면서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또한 둘 다 술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렸으며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서 표현되는 정신적인 고뇌, 문제들이 상당부분 그의 고민들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링조어는 결국 죽었으나 헤세는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의 내면에는 프렌치 버밀리언, 코발트 바이올렛, 제라늄 레커, 베로나 그린, 크롬 옐로, 카드뮴 옐로, 잉글리시 레드, 시에나, 치노버 그린 등의 팔렛트의 다양한 색의 조화를 통한 미술활동의 심리적인 치유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6인의 친구들과 붉은 여왕을 만나러 갔을 때, 그 인물들 수 만큼이나 다양했던 개성으로 파렛트의 색채 만큼이나 조화로웠던 정서를 회복한 것은 아닐까.



<동그라미 속 별 지역이 루가노다>


여담으로 그가 클링조어라는 인물을 만들어내면서 많은 부분 고흐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동양사상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이태백이라 칭하는 클링조어에게 이야기하는 아르메니아인이 그를 지칭하며 '이태'선생 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p.87) 서양인들이 성과 이름을 혼동하여 잘못 사용된 걸 표현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헤세의 글에서는 유독 여성 뮤즈들 직접등장이 많건 적건간에 반드시 등장한는 것 같은데 이 소설에서도 클링조어가 사랑인가 고민하는 '지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니, 이태리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설이니 베아트리체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명들은 이를테면 라구노->루가노, 팜팜피오->팜피오  마누초->무차노, 카스타녜타->몬타뇰라 등으로 약간씩 이름이 변경되어 등장하는데, '루가노'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 즈음에 있는 도시로 실제로 독일어와 이탈리아어가 공용으로 쓰인다. 작년에 갔을 때에 독일어만 생각하고 갔다가 낭패를 볼 뻔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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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한다, 에케 호모(Ecce Homo), 이것이 인간이라고. 말세의 지치고, 탐욕스럽고, 거칠고, 천진하면서도 세련된 우리 인간, 죽어 가는, 죽고자 하는 유럽인이라고, 동경함으로써 고상하게 되고, 악덕으로 인해 병들고, 자신의 몰락을 앎으로써 열광적으로 생기를 얻고, 발전을 준비함과 동시에 퇴보가 무르익는, 똘똘 뭉친 열정이자 넌더리나는 권태, 모르핀 중독자가 독에 중독되듯 운명과 고통에 중독된, 고독한, 내면적으로 약화된, 태곳적의 파우스트이자 동시에 카라마조프, 동물이자 현자, 적나라하게 노출된, 명예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완전히 벌거벗은, 죽음을 죽이기 위해 죽음에 대해 어린아이가 느끼는 공포로 가득한 동시에 권태에 지쳐 죽음에 대한 준비를 끝낸 유럽인이라고.

- p.93


작은 팔레트는 불의 힘을 가진, 순수한, 섞이지 않은, 가장 밝은 색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색들은 그의 위안, 그의 탑, 그의 무기고, 그의 기도서, 사악한 죽음을 겨냥하여 쏘는 그의 대포였다. 자주는 죽음의 거부였으며, 치노버는 부패를 조롱했다. 무기는 훌륭했고, 작고 용감한 그의 군대는 광휘를 발했다. 재빠르게 발사하는 대포는 빛을 내며 위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모든 발사는 헛되었다. 하지만 발사는 상당히 훌륭했으며, 그것은 행복이자 위안이었고, 여전히 생명이었고, 여전히 승리의 함성이었다.

- p.59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황승환역
출판 : 민음사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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