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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기사단장 죽이기』_무라카미 하루키 다만 내게는 딱 한 가지, 굳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아내의 눈을 보면 열두 살에 주은 내 누이동생의 눈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것이 그녀에게 반한 가장 큰 이유라는 사실이다. 그 눈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열심히 내 사람을 만들려 노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고, 실제로 마지막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숨겨온 유일한 비밀이었다. 그녀가 내게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아마 있었을 테지만-나는 모른다. 아내의 이름은 유즈였다. 요리에 쓰는 유즈(柚子). 섹스할 때 가끔 장난삼아 그녀를 '스다치(酢橘)' 라고 불렀다. 귓속말로 살짝 속삭이는 것이다. ㅡ럴 때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반쯤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스다치가 아니라 유즈. 비.. 더보기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_가도이 요시노부 (전략)도전적인 눈빛으로 인생을 건 젊은이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이 녀석을 데려와야겠군.' 하고 정했다고 한다. 손기술이나 지식은 나중에 얼마든지 익힐 수 있지만 야심만큼은 타고나는 법이다. -p. 98 어렵다. 2년만에 다시 포스팅을 하려고 하니 원래 어떤 식으로 썼었는지, 어떤 컨셉으로 후기를 남겼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몇 되지도 않는 포스트들을 살펴보려고 했는데 일관적이지도 않고 가독성 역시 떨어지는 탓에 그냥 새로운 마음으로, 내키는대로 해보기로 했다. 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견제에 의해 자신의 원래 영토였던 도카이 지방을 헌납하고 간토지방으로 봉해지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봉토 교체시 미곡 수확량이 150만석에서 250만석 이상으로 오른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더보기
『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 귀도 레니Guido Reni의 하지만 내 최초의 사랑이 어떤 형태로 종말을 고할 것인지, 내가 희미하게나마 예감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어쩌면 그런 예감이 몰고 온 불안이 내 쾌락의 핵심이었는지도 모른다.- p. 75 지금은 그 출처를 정확하게 찾을 수가 없지만, 작년 즈음인가 신문에서 '자신이 동생애자인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느냐' 하는 고민을 했다는 학생이 꽤나 많았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당시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었는데, 요즘 '걸크러쉬'라는 신조어가 많이 쓰이는 현상을 생각해보면 정신의학자들은 확실히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조심할 것은 그 현상들이 '정신병'적이라는 표현은 아니라는 점이며, 병리학에서 진행단계별로 제각각의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이 인간정신에 대한 동일한 과정이 반드시.. 더보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헤르만 헤세 그는 증오로 가득 차서 집시들이 몰고 온 초록색 마차 아랫부분의 주름을 파리 블루로 할퀴듯 그려 넣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크롬 옐로를 방충석防衝石 모서리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칠하지 않고 비워 둔 곳에다 치노버를 찍어서 튀어나온 하양을 죽여 버렸으며, 영속을 얻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잔인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노랑과 나폴리 옐로로 고함을 쳤다. 그는 신음을 내면서 더 많은 파랑을 무미건조한 먼지투성이의 초록에 내동댕이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속의 불을 저녁 하늘에 붙였다. - p.59 --- 이 소설을 보고 느낀 점은 한마디로 '(색채에 관해)작정하고 썼구나'였다. 화가 클링조어가 마지막으로 보낸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여름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 그대로 그.. 더보기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에밀 시오랑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후략)- p.10 철학에 입문하는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니체에 끌려 문을 두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의 생애주기상 느끼게 되는 특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표현할 수 없는 의문, 원인 불명의 배고픔으로 인하여,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해석 가능한 여지가 많다고 여겨지는 그 짧지만 강렬한 아포리즘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것이 아포리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 그의 세 가지 측면들은 이렇다. 태어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작된 '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자식으로 상징되는 미래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 의식은 살에 박힌 가시보다도 더 괴로운 것, 그것은 살을 찢는 .. 더보기
『자전거 전국일주-달려라 펑크난 청춘』, 박세욱 당신이 여행 해본 곳 중에 가장 먼 곳은 어디였습니까? 꽤나 구체적인 이 문장은 내가 종종 타인에게 묻곤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나이를 더 먹고, 나와 만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 이 질문은 바뀌지 않을까 한다. "20대에 당신이 여행해본 곳 중에 가장 먼 곳은 어디였습니까?" 물론 그 질문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구매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2010년생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기 위해 책방에서 업어왔던 책이었는데, 어느새 잊혀져 오래 신경써주지 않은 자전거 안장처럼 먼지만 앉아가던 책이다. 책은 총 네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서울로부터 남으로는 제주도를 지나 부산을 거쳐 호미곶, 동북의 거진, 서북의 임진강을 도는 것으로 전국일주의 코스를 소개한다. 부제에서.. 더보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불어가는 바람 소리가 휘익 하고 들리더니 창문이 덜컹거렸다. 바람이 거세지는 모양이었다. 창밖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사람도 나무처럼 일 년에 한 번씩 죽음 같은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깨어나 연둣빛 새 이파리와 분홍빛 꽃들을 피우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 p.24 검은 색깔의 대형차들이 즐비한 곳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가방을 들고 분주히 내려 들어서고 있었다. 변호사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들도 죽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백년 후엔 이곳에 오늘 있었던 사람 중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서두르려고 하는 것이다. 어서 죽여야 한다고... 아니 큰오빠는 이 이야기를 .. 더보기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경향신문 문화부 작년 12월 초였던가. 마무리하여 제출해야 할 글이 마무리가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찾은 책방에서 다른 책 하나와 함께 업어온 책이다. '뉴 파워라이터'라고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기존의 글쓰는 일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직군이나 소재, 활동영역에 있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면서도 책쓰는 일에 열심이고 그것이 매력적이라 대중적인 선택을 받은 이들 대한 이야기. 그들이 활약하는 영역만큼이나 소재와 문체, 동기, 자료수집이나, 기획, 메모의 방식 등에서도 다양한 24명의 '뉴 파워라이터'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인터뷰기사 형식으로 엮어놓았다. 강신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강조한 읽고 쓰는 일에 있어서 '배설'의 중요성 또한 의미있게 와 닿았다. 또한 강조되었던 목적의 중요성도.. 더보기
『사양斜陽』, 다자이 오사무 하지만 나는 살아 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성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잡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나는 알을 배고 구멍을 파는 뱀의 모습을 다다미 위에 앉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하지만 내겐 끝까지 단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비열해도 좋다. 나는 살아남아서 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과 맞서 나갈 것이다. 앞으로 어머니가 돌.. 더보기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권하는데 그걸 거부하는 것은, 그때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서 그 순간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의 불행은 거부하는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남이 권하는 데 거부하면, 상대에게나 내게도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틈이 생기는 것 같은 공포에 위협받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렇게 반미치광이가 되서 찾아다니던 모르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부한 겁니다. 요시코의 그 '천사 같은 무지'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던 걸까요. 나는 그 순간 이미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건 아닐까요.- p.130 ------------------------------------------------------------------------------- 생각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