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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에밀 시오랑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후략)

- p.10

 


철학에 입문하는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니체에 끌려 문을 두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의 생애주기상 느끼게 되는 특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표현할 수 없는 의문,  원인 불명의 배고픔으로 인하여,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해석 가능한 여지가 많다고 여겨지는 그 짧지만 강렬한 아포리즘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나 역시 그것이 아포리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 그의 세 가지 측면들은 이렇다. 태어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작된 '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자식으로 상징되는 미래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


   의식은 살에 박힌 가시보다도 더 괴로운 것, 그것은 살을 찢는 예리한 칼날.

- p.70


태어난 작품은 사멸하기 마련이다. 미완성 원고는 살아 본 적이 없으므로 죽을 수가 없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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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나의 의견은 너무도 정확하기 때문에 만일 내게 자식이 있다면 당장에 목 졸라 죽일 것이다.

- p.180


현인이었던 몽테뉴에게는 자손이 없었다. 히스테리 환자였던 루소는 아직도 여러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나는 웅변을 부추기지 않는 사상가들만을 좋아한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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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의 욕구는 인간 속에 너무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무도 그것을 뿌리 뽑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근본은 분명 악마적인 것이어서 모든 인간에게 파괴의 욕구는 내재되어 있다.

현자란 마음이 진정된, 은둔의 파괴자를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 중인 파괴자들이다.

- p.190


악마를 믿을 때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해될 수 있고 명확한 것이었다. 악마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의적이고도 힘겹기만 한 새로운 해석을 찾아야만 했다.

- p.246


루비콘 강을 건넌 그 사람은 파르살루스 전투 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용서했다. 배신했던 동료들을 아무런 원한 없이 대하는 그의 관대함이 오히려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욕을 받은 듯이 느꼈고 그래서 너그러움과 경멸에 대해 그를 벌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원한에 찬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가 독재자로 행동했더라면 그들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오만하게도 충분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원망을 품었던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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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을 배제하는 것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해석된 텍스트는 이미 텍스트가 아니다. 사람은 사상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그것을 분해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사상과 투쟁하지만 그 과정을 묘사하진 않는다. 철학의 역사는 철학의 부정이다.

- p.209


만일 랭보가 어떤 식으로든 삶을 계속할 수 있었더라면(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이 사람을 보라를 집필한 다음 계속 글을 쓴 니체 같은 사람, 천재의 만년을 생각해 보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결국은 후퇴하여, 현명해져서 자신의 폭발에 해석을 붙여 설명하고, 자신을 해명하고 말았으리라. 그것은 모두 신성모독이다. 의식의 과잉은 신성모독의 한 형태일 뿐이므로.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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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인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는 이렇게 읽어진다.


태어남->인식의식신체에 묶임

언어사용어떤 을 위한 경주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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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와 사상철학들 중에서 그는 태어남 자체를 고통으로불행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어느 정도 인식의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더불어 세상이 악마에 의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는 점인간존재의 근본은 악마적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나의 생각과도 많이 일치한다.(190,158)


작가는 분명 유대교기독교도교노자공자불교와 인도의 종파들베다그리스로마터키남미의 문명 등 서양과 동양의 철학은 물론 문학에 대한 이해까지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인 듯하다. 그럼에도 이런 아포리즘 외에 다른 글은 없는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과 표현력을 가진 사람의 산문은 없을까 하는 아쉬움에 잘 하지 않는 싫은 소리를 지껄여보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 신념이 어떤 것인가 생각을 해보다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존재 자체가 우연적인 것근거 없는 것고로 헛되다'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죽음 이전의 어떤 완전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긴 글을 남겼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다양한 글의 형태 중에 내가 아포리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개인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글 읽기를 선호하지 않으며 그런 연유로 몇 해 전 구매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여전히 무거운 북엔드의 역할만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연속되는 이이기가 아니니 집중하기 어렵고각각의 문단마다 배경을 떠올리고 이해를 요구하는 불친절함그리고 그 모호함이 무게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리라.

 

이런 감정을 시에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한다시는 최소한 솔직하다언어로 기교를 부릴지언정 더 많은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아는 체 하지 않고 이해가 가능하도록, 심지어 그것이 언어파괴적인 모습일지라도 불사한다그런 의미에선 친절하다고 할 수 있다. 종종 불친절한’ 시들도 있으나 숨긴 바가 많다는 의미에서 아포리아로 이해한다.

 

25년 후에 나는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이 옛날 그대로였고오히려 더 생생했다오린 시절을 향해 뒤로 물러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세월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일그러진 얼굴과 주름살을 피하기 위해 그는 무슨 수를 썼단 말인가그가 살아온 게 틀림없다면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차라리 유령이라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분명 속임수를 썼으리라산 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게임을 충실히 행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렇다그는 유령이었고 날치기꾼이었다얼굴에서는 아무런 파괴의 흔적도 없었고유령이 아니라 하나의 개체임을실재하는 인물임을 증명하는 어떤 표적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거북스러웠고 두렵기까지 했다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시간을 속이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 p.94



냉정하게 요약하면 ‘25년 만에 만난 친구의 여전히 젊은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책은 그의 사후에 발견된 노트 뭉치를 출간한 것이라고 했어야 감동에 가까운 아쉬움을 느꼈을 것 같다위의 토막글도 주인공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모습의 표현에 대한 메모라면 훌륭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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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은 글이었다비록 다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읽어 미처 음미하지 못한 것들이느끼지 못한 의미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옮긴이가 말하듯 어느 페이지에서부터 읽기 시작해도 좋은 책으로 느껴지는 바곁에 두고 읽어야겠다어쩐지 화장실에 가장 어울리는 책이 명심보감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유혹자인 마라가 부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을 때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권리로 너는 인간과 우주를 지배하려 드느냐너는 인식을 위해 괴로워한 적이 있느냐?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하든지 간에 사상가에 대해서라면 특히 그래야겠지만떠올려야 할 유일하고 중요한 의문은 바로 그것이다인식을 향해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대가를 치른 사람들과훨씬 더 많은편리하고 무심한 지식시련 없는 지식을 분배받은 사람들 간의 확연한 차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