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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기사단장 죽이기』_무라카미 하루키

  



  다만 내게는 딱 한 가지, 굳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아내의 눈을 보면 열두 살에 주은 내 누이동생의 눈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것이 그녀에게 반한 가장 큰 이유라는 사실이다. 그 눈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열심히 내 사람을 만들려 노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고, 실제로 마지막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숨겨온 유일한 비밀이었다. 그녀가 내게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아마 있었을 테지만-나는 모른다.


  아내의 이름은 유즈였다. 요리에 쓰는 유즈(柚子). 섹스할 때 가끔 장난삼아 그녀를 '스다치(酢橘)' 라고 불렀다. 귓속말로 살짝 속삭이는 것이다. ㅡ럴 때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반쯤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스다치가 아니라 유즈. 비슷하지만 달라."


 - 1권_p.52



실컷 써놨다가 한 번 날려먹고 다시 쓰려니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보려고 한다. 책 이야기는 거의 없고 내가 받은 느낌에 대해서만.


책을 골랐던 이유는 크게

1)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으로 회자 되었던 소설

2) 처음 읽어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이었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 이 정도 언급에 대해 민감할 정도로 일본의 역사 교육이 처참한 수준인가?

2) 성性적인 부분이 많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하구나.

하고 느꼈고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도 성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내가 그리는 것은 물론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는 동시에 죽은 누이동생(고미)와 옛 아내(유즈)의 모습이 섞여드는 듯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히 섞여들어버렸다. 나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여자들의 모습을 아키가와 마리에라는 소녀에게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건전한 행위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식으로밖에 그릴 수 없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할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그림을 그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림에 나타내는 것.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나 자신의 비밀신호를 그 안쪽에 은밀히 그려넣는 것.


 - 2권_p.220





흥미로웠던 건 등장인물들의 자동차를 통해서 그들의 개성을 표현했다는 점인데, 가령 주인공의 낡은 빨간색 푸조 205와 후에 타게 되는 중고 도요타 코롤라 웨건, 멘시키의 재규어, 랜드로버, 인피니티 세단, 아키가와 쇼코의 파란색 프리우스와 주인공 여자친구의 빨간색 미니쿠퍼 등이다.

 그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장치로 특정할 수 있는 사물이 사용되었다는 게 어떤 느낌인가 하면, 영화화 된 소설을 보면서 등장인물의 이미지와 독자 개인이 상상했던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있는데, 이 일치하지 않는 지점은 다시 독자들 개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예컨데 내가 멘시키를 상상하면서 떠올렸던 인물은 '옷 잘입는 할아버지'로 유유명한 닉 우스터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이미지와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게도 100% 일치하는 이미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의 인식 체계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서 파생되는 한계를 가진 것을)






그러나 자동차라고 하는 사물은 다르다. 연식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금씩의 디자인은 떠올릴 수 있으나 우리 인식 속에 마케터가 심어놓은 차량의 포지셔닝이나 특징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색상'은 절대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아키가와 쇼코의 모습은 다를 수 있으나 니가타의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빨간색 푸조나, 오다와라 산머리를 향해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는 파란색 프리우스의 이미지는 각자의 상상 속의 탑승자의 모습과는 무관한 어떤 공통된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그점이 흥미로웠다. 그런 관점에서 멘시키(免色)라고 하는 이름 역시 하나의 장치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는 몸을 비틀어 안으로 욱여넣었다. 돈나 안나의 말대로 나는 이미 길을 선택했고, 다른 길을 선택하기란 이제 불가능하다. 기사단장은 그것 때문에 죽어야 했다. 내가 이 손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그의 작은 몸을 피 웅덩이에 잠기게 했다. 그 죽음을 무익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등뒤에서는 차가운 촉수를 지닌 무언가가 나를 제 수중에 넣으려 한다.


- 2권_p.424



그리고 중간중간의 주인공과 이성들 간의 성적인 묘사 뿐만 아니라, 글 전체를 관통해서도 성적인 요소를 느낀다. 가령 멘시키와 이야기를 공유하게 되는 '우물'과 후에 기사단장의 죽음으로 가게 되는 '동굴' 전체를 보면서 출생에 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팔이 부러졌나 싶을 정도로 욱여넣어야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 등을 지나서 주인공은 그가 가졌던 이미지나 형질을 버리고 무채색의, 멘시키免色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오는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 재탄생의 과정에 이르기 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와 같은 역할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특정할 수 없음에도 괜찮다라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무언가를 믿을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곧 아버지가 확실하지 않은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될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상관없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는 당신이 않을 아이의 잠재적인 아버지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 생각이 당신을 임신시켰는지도 몰라. 일종의 관념으로, 특별한 통로를 거쳐서."

  "일종의 관념으로?"

  "다시 말해, 일종의 가설로."

  유즈는 한동안 내 말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만야 그렇다면 제법 근사한 가설일 거야."

" 이 세계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 2권_p.584







기사단장 죽이기 1~2 세트
국내도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홍은주역
출판 : 문학동네 201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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